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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수 김태균선수 맞어?

함께모두 2012. 8. 17. 22:39

 

지금의 김태균선수의 지금의 얼굴만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래 사진들을 보면 '김태균선수가 맞나?' 하실 것 같네요.

 

 

* 신인시절 첫 해 스포츠 신문에 났던 김태균선수의 사진 같아 보입니다.

 

 

* 이 사진은 아래 기사에 실린 사진인데... 바지에 번호가 38번이로군요.

 

김태균선수의 등번호는 지금의 52번, 2002년에 잠시 10번을 달았다가 다시 52번으로 달았던 것으로 나오는데

38번이 달린 바지를 입고 있네요.

 

현재의 김태균선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체형도 바뀌고, 얼굴형도 많이 달라진 모습이네요.

 

아래 기사는 김태균 선수의 딸에게 아빠가 자신의 과거 야구인생을 들려주는 형식의 기사인데...

고졸출신 선수들의 차별을 잘 말해주는 듯 하네요.

그러고보니 한화에는 고졸 연습생 출신의 장종훈 선수도 있었고,

김태균 선수도 그렇고 굵직한 고졸출신들이 많군요.

 

 

고졸이어도 괜찮아~~~

자신의 일만 잘하면 최고가 될 수 있어~~~

김태균선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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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에서 펑펑 울고 결심했어

한겨레 | 입력 2012.08.17 20:50

 

 

 

[한겨레]김태균의 편지


1차 지명으로 한화에 입단


방망이는 자신있었는데


첫 연습경기부터 바닥 쳤지

 

그 뒤 2군서 1군 대타선수로

그리고 3루수 붙박이로

마침내 신인왕을 거머쥐었어

효린아, 이제 3번째 편지를 쓰는구나. 잦은 원정경기 탓에 자주 못 보는데 볼 때마다 부쩍부쩍 자라 있더구나. 비시즌 때는 아빠가 같이 많이 놀아줄게. '효린'이란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궁금하지? 원래는 엄마랑 아빠가 효린·태린 두 이름을 지었고, 할아버지가 두 이름을 갖고 작명소로 가서 최종적으로 결정했지. 본받을 효, 이웃 린. 괜찮지? '이름'이란 게 참 미묘한 것 같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이름'에는 책임감도 뒤따르니까. 효린이도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눈물로 시작된 아빠의 프로 데뷔 시절 얘기를 해줄게.

 

 

천안북일고 붙박이 4번 타자. 연고지 팀 한화 이글스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몰라. 특히 3학년 때 타율이 5할(26타수 13안타 8볼넷)이었거든. 계약금도 1억5000만원 받았고. 신인 지명을 받고 경남 남해에서 진행된 한화 가을 캠프에 참가했어. 방망이는 정말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연습경기 때 진짜 못 쳤어. 29타수 3안타였나. 홈런이 한 개는 있었지만 무려 스무번(!!!)이나 삼진을 당했단다. 얼마나 창피했던지. 투수들의 공을 보면서 '정말 프로 투수들은 다르구나' 싶었어.

혼자 상심하고 있는데, 더 큰 좌절을 느낀 사건이 있었어. 남해 숙소는 조립식이어서 밤에 옆방에서 말하는 게 다 들렸더랬지. 하루는 자려고 누웠는데 옆방 코치 얘기가 다 들리는 거야. 주로 "김태균 정말 못하더라", "누가 저런 애를 1차 지명으로 뽑았지?" 등등의 뒷담화였지. 그 말을 듣고 혼자 화장실 가서 펑펑 울었어. 그렇게 운 게 처음이었을 거야. 울면서도 마음을 다잡았어. 진짜 운동 독하게 열심히 해야겠다고. 어쩜 그때 깨달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 깨닫지 못했다면 아마 계속 2군에 있었을 거야. 1차 지명이니까 당연히 첫해부터 1군에 올라가서 시합에 뛸 줄 알았고, 팬들의 환호를 받을 거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거든. 그게 무참히 깨진 거지. 아마도 올해 가을에도 남해 캠프 화장실 문 붙잡고 우는 신인 선수들이 있지 않을까.

당시 이정훈 2군 타격 코치님(현 천안북일고 감독)과 정영기 스카우트(현 한화 2군 감독)께서 많이 도와주셨어. 이 코치님은 "타격에서 가능성이 보인다"고 위로해주시면서 "나와 함께 2군에서 열심히 해보자"고 하셨지. 기술적인 부분을 다듬는 데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셨어. 정 스카우트님은 아무래도 나를 직접 뽑았기 때문에 책임감이 있으셨는지 타격 연습할 때 티볼도 띄워주시고 연습 다 끝나고 나서도 남아서 1000개 이상 더 때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어. 훈련하면서 생각한 것은 단 하나야. '3년 동안 2군에서 열심히 준비하고 3년 후에 꼭 1군 가자'고. 부족한 것을 알고 남들보다 배 이상으로 연습을 하니까 뭔가 되는 것 같긴 하더라. 하지만 해외전지훈련에는 가지 못했어. 이광환 당시 한화 감독님은 야구 선수도 아니라면서 고졸 신인들을 단 한 명도 캠프에 데려가지 않으셨거든.

프로 첫 데뷔는 2군에서 했어. 2군에서도 4번을 쳤지. 4월 중순 즈음해서 1군에서 부르더구나. 내가 생각해도 2군 성적이 꽤 좋았거든. 그날이 마침 수원 원정 이동일(월요일)이었어. 사복을 입고 대전구장으로 나가서 구단버스를 타면서 코치님들께 인사를 하는데 한 코치분이 그러시더라. "너는 왜 왔니?"라고.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내가 잘못 온 건가? 장난으로 하시는 말씀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지. 어쩌면 존재감 제로의 선수였기 때문일지도 몰라.

수원 현대와의 2차전(2001년 4월17일)에서 데뷔 첫 경기를 했어. 대타로 출전했는데 볼넷으로 출루했지. 다음날도 대타로 나갔는데 그때는 삼진을 당했어. 3연전이 끝나고 다시 2군행을 통보받았어. 그리고 한 달 후에 다시 1군으로 돌아왔지. 붙박이 1군이 아니면 팀 사정에 따라 1, 2군을 오가는 게 선수의 숙명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조금 이해가 안 되기도 했어. 올라간 날 삼성에 0-12로 뒤지고 있는 9회말 2아웃에 대타로 또 타석에 섰어. 마운드에는 김상진 선배가 있었는데 커브를 받아쳐서 홈런을 만들어냈지. 프로 무대 4타석 만이었어. 나중에 들었는데 할아버지는 집에서 방송 보시면서 감격해서 우셨다고 하더라.

홈런이 나온 다음부터는 팀 내 위상이 좀 달라졌어. 패색이 짙은 경기에 대타로 나가는 게 아니라 중요할 때 꺼내드는 대타요원이 된 거지. 종종 선발로도 나섰어. 12경기 연속 안타도 쳤단다. 전반기 끝났을 때 성적은 41경기 출전 타율 0.326 5홈런 17타점이었어. 주로 대타로만 나선 고졸 신인치고는 꽤 괜찮았지? 겨울에 많이 훈련한 게 도움이 된 거지.

한번은 2군으로 내려가라고 하더라고. 짐을 싸서 집에 갔는데 다음날 전화가 다시 오는 거야. 다시 합류하라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더구나. 얼핏 들으니 방망이 솜씨가 너무 아까워서 2군행을 번복한 것이라고 하더구나. 대전 삼성전(7월26일)이었을 거야. 1-3으로 뒤지고 있던 9회말 2아웃 1루에서 3루수 강석천 코치님 타석에서 대타로 나와 동점 투런 홈런을 쳤어. 3-3 동점으로 연장에 갔는데 3루 수비요원이 없었지. 고등학교 때는 3루수도 봤으니까 내가 3루수로 나가서 10회 초 첫 수비에서 3루 라인을 타고 온 2루타성 타구를 잘 잡아서 아웃시켰어. 그걸 감독님께서 잘 보셨나봐. 그 후 3루수 붙박이로 시즌 끝날 때까지 나갈 기회가 많아졌거든. 3루수로 54경기에 선발 출전했으니까.

신인왕? 홈런 20개에 타율(0.335·245타수 82안타)은 좋았지만 타석(245타석)이 규정타석(399타석)에 한참 모자라서 기대를 안 했어. 사실 신인왕이 현장투표로 진행된다는 것조차 몰랐거든. 어릴 적 신인왕 시상식은 봤었는데 그게 무슨 상인지도 몰랐어. 시상식장에도 할아버지가 대신 가셨고. 아빠는 4개국 친선대회에 출전하고 있었단다. 현장에서 경기 준비하고 있는데 어떤 기자가 휴대폰으로 전화 연결해서 수상 소감 물어보더라. 상을 직접 받지 못했으니 실감이 나지도 않았고, 그게 어떤 기분이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어.

신인 때는 정말 공 보고 공 쳤던 것 같아. 그때는 투수들에게 '김태균'이라는 선수가 생소했고, 고졸 선수라서 잘하면 좋은 거고 못해도 본전이었지. 생각 없이 하니까 야구도 잘되더구나. 생각해보면 그때가 참 행복했던 것 같아. 야구는 알면 알수록 힘들고 머리가 아파오는 종목이거든. 그래도 아빠는 '김태균'이니까 더욱 힘을 내야겠지? 12년 전 남해 캠프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고. ㅎㅎㅎ.

정리 김양희 기자whizzer4@hani.co.kr